협회 연혁

KAGROPA 0 33,625 2018.03.04 11:30



필라델피아 한인 식품인 협회 연혁


필라델피아 한인 식품인 협회 略史(약사)



필라델피아 한인식품인 협회는 필라델피아 한인 단체 가운데 가장 잘 운영되는 단체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1974년에 창립돼 35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필라델피아 한인 식품인 협회는 현재 약 700여 명의 식품인들을 정회원 및 일반 회원으로 두고 있다.


식품업계는 한인 경제를 이끌어 가는 대표적 업종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약 8년 전만 해도 그로서리를 비롯한 식품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이 운영하는 업소는 대략 1200여 업소에 달했으나 현재는 그 절반 이하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양적인 면에서는 절반 이하로 줄었지만 규모는 오히려 커져 예전 같은 작은 규모의 코너 스토어는 거의 없고 중형 또는 대형업소들만 남아 전체 매출액수는 오히려 높아졌다.


규모가 작은 업소는 모두 은퇴나 전업 등의 이유로 타민족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갔거나 폐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식품인 협회는 창립 당시 친목과 정보 교환을 주 목적으로 하고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으나 크게 활성화 되지는 않았다.


협회 설립 당시 천기관씨가 초대 회장을 맡았고서경호 전 한인회장이 2대 회장을 맡았으며 이상익씨 와 박승수씨가 회장을 역임했다는 것은 확인됐으나 안타깝게도 그 중간의 기록이 없다.


인류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잃어 버린 고리(The Lost Link)’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많은 회원들이 지나간 흔적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다.


협회 설립 이후 회원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협회가 직접 나서서 힘이 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협회가 본격적으로 활성화 된 것은 1989년에전기풍씨가 14대 회장으로 선출되면서부터였다.


전기풍 회장 당시는 한인 경제에 불경기의 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때였고 한인들, 특히 일선 그로서리에 권총 강도가 많이 들어 한인들의 피살 사건이 늘어나던 때였다.


전기풍 회장은 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각종 안전대책을 마련해 홍보하고 공동 구입을 주창했으며 오랫동안 발행이 중단된 협회보를 발행해 협회 업무를 회원들에게 홍보하는 등 상당한 기간 동안 침체됐던 협회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전기풍 회장은 이와 함께 전국적 네트웍의 필요성을 느껴이명식 당시 필라 식품인 협회 부회장, 로스앤젤레스의 김양일 회장 등과 함께 전미주식품상 총연합회(National Korean American Grocers Association)를 창립했다.


15대와 16대 회장을 역임한 이명식회장은 4년 동안 협회의 발전을 위해 많은 애를 썼으며 이 가운데 1991년에 아담스 마크 호텔에서 식품 쇼를 실시해 한인 경제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명식 회장은 4번의 식품 쇼를 통해 한인 경제의 활성화에 큰 기여를 했으며 흑인 학생들을 위한 장학생 선발 제도를 통해 “한인들이 흑인들의 이웃”이라는 점을 지역 주민들에게 뚜렷이 심어 놓는데 성공했다.


이명식 회장은 임기 중 회원 업소의 영업 환경을 파악하기 위해 설문 조사를 실시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협회 운영을 과학적으로 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 식품인 협회를 모범적인 단체로 운영하자신희자 회장에 의해 한인회 부회장으로 발탁이 되기도 했다.


17-18대 회장을 역임한김문석 회장은 필라델피아 시정부가 1996년에 시 조례로 식품위생 안전 자격증(Food Handling Certificate) 취득을 의무화 하자 임원들 가운데 신인아씨와유인현씨를 펜실베니아 주립대학(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main campus)에 2주일 동안 파견, 합숙 교육을 통해 지도자 교육과정을 마치게 하고 식품인 협회(Kagro of Philadelphia)를 한국어 교육기관으로 정식으로 등록시켜 회원들의 당면 과제를 해결했다.


김문석 회장은 또 미주 동아일보와 합동으로 4.19마라톤 대회를 주최하고 회원들을 위한 건강보험 단체 가입을 실현시켰으며 식품협회 골프대회를 실시했다.


1999년에 필라델피아 한인식품인 협회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40대 기수론을 연상시키는 젊고 꿈이 큰 유인현씨를 19대 회장으로 선출해 전 미주 내 29개 한인 식품인 협회 가운데 최초로 협회 홈페이지 www.kagro.com 를 개설해 사이버 공간에 한인 식품업계의 깃발을 우뚝 세웠다.


필라델피아 한인 식품인 협회 홈페이지는전미주 식품상 총연에서 타 지역 협회의 부러움을 사다 못해 총연에서 구매의사를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다.


유인현 회장은 또 한 동안 중단된 협회보를 부활해 협회 업무 홍보에 큰 효과를 보았으며 호텔에서 일률적으로 실시되던 식품 쇼를 델라웨어 강 관광 보트에서 실시해 새로운 시도와 특별한 효과로 관련 업체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 금융 세미나와 미래 세미나 등 각종 세미나를 통해 앞선 정보, 실 생활에 보탬이 되는 알찬 정보를 대중적으로 전달하는 협회 활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식품협회 관계자들은 “이 당시에 임원들이 수 적으로도 가장 많았고 의욕도 가장 넘쳤다. 회장의 지도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유 회장은 1996년부터 지금까지 연 4회 정도의 식품 위생 교육을 하고 있으며 그 동안 유 회장의 강의를 들은 회원은 연 인원 3천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2001년에 협회는 20대 회장으로 신진 회장을 선출해 알츠하이머 가족 돕기 골프 대회를 비롯한 각종 대외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때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이슬람 교도들의 공격을 받아 붕괴되는 911 사태가 발생해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신진 회장은 아담스 마크 호텔이 아닌 사우스 필라의 홀리데이 인에서 식품 쇼를 개최하고전미주 식품상 총연 총회를 필라델피아에 유치하는 등 내외적인 활동의 폭을 넓혔다.


신진 회장은 임기가 끝난 후 구군서 총연 회장에 의해전미주 식품상 총연 부회장으로 발탁됐다.


2003년에 협회는 뛰어난 행정가 이승수 수석 부회장을 21대 회장으로 맞아 또 한번의 도약을 했다. 오랜 불경기로 어려움을 겪는 회원들을 위해 공동의 힘을 최대한 활용한이승수 회장은 소수 정예화 정책으로 ‘가능한 최고의 혜택을’ 회원들에게 제공했다.


쿨 담배 회사와 맺은 리베이트 제도는 가장 돋보이는 협회 정책이었으며 소수 정예화 사업으로 실시한 공동 구매는 높은 참가율과 성과로 정회원들에게 만족을 주고 일반회원들에게 협회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플랜이었다


이승수 회장은 공동 구매를 실행에 옮겼을 뿐 아니라 셀폰카드 판매 회사인 K&B가 출현했을 때 가능성을 가장 먼저 파악하고 이를 회원들에게 홍보하는 등 이윤 창출 사업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회원들에게 제공한 회장으로 꼽히고 있다.


무엇보다이승수 회장은 협회 홈페이지를 만든 장본인이고 “딸자식 키워 시집 보내는 마음으로” 홈페이지를 가꾸고 있다.


총연에서 탐을 내던 필라 식품인협회 홈페이지는 필라 식품인 협회가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지만김주한 총연 회장 당시 미주 한인 식품업계의 발전을 위한 대승적인 차원에서유인현 /이승수 회장의 결단으로 총연과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승수 회장은 임기가 끝난 후김주한 총연 회장에게 발탁돼전미주 식품상 총연 9대 집행부 수석 부회장으로 봉사했다.


2005년에 협회는 이창희 수석 부회장을 22대 회장으로 맞았다.


1990년도 전기풍 회장 당시 협회보 편집을 시작으로 협회와 인연을 맺은이창희 회장은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시행착오와 더불어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2005년도 식품인의 밤과 장학금 수여식을 치르고 5월에 연례행사인 골프대회를 치른이창희 회장은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임원들의 건의에 따라 주요 행사의 패턴을 바꾸었다.


당시까지 행사 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추첨을 비롯한 여흥 시간을 폐지하고 간단한 세미나로 대체했다.


협회의 위상을 이유로 계속하던 골프 대회도 2005년을 마지막으로 중단했다.


불경기가 지속되면서 행사 주최측이나 대회 참가자 모두가 부담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타 협회에서도 같은 이유로 대회를 중단 또는 폐지하는 시기였다.


이창희 회장은 재임 기간에 협회와 회원들의 권익을 제고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대표적인 사업이 분기 별로 마련한 세미나였다.


사업상 세무관리, 사업자금 조달, 식품위생 관련 법규, 건강, 이민법 등이 분기 별 세미나의 주요 의제로 등장해 회원들이 실무자와 직통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이 가운데 이민법 세미나는 식품인 협회가 너무 앞서간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 사업의 하나였다.  그러나이창희 회장은 “식품위생 교육을 받는 회원들 가운데 영주권이나 소셜 시큐리티 넘버가 없어 차별을 받는 상황을 몇 차례 목격하고 협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아시안 변호사 협회와 연결이 닿아 실시한 것”이라며 “여러 가지 말이 있었지만 협회가 회원들을 위해 직접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한 것으로 보람을 느낀다”고 회상했다.


이창희 회장은 임기 중 협회 이름으로 된 미디어 창출에 관심을 기울여 ‘The Voice of Korea Town’ 이라는 영자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의 행정, 교육, 연구 기관과 제조업체, 도소매업체 등을 대상으로 발행한 영자 신문은 적지 않은 관심을 끌었으나 인력과 재정 부족으로 지속되지 못했다.

이창희 회장은 또 협회의 발자취를 사진으로 담아 기록하는 방법의 하나로 협회 달력을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 동안 발행하기도 했으며 2007년에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식품업의 현재와 앞날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명식 회장과 신진 회장에 이어 세 번째로 실시한 2007년도 설문조사는 필라델피아 지역 각 동포 언론을 통해 상세히 보도되고 협회 홈페이지를 통해 외부에 상세히 알려지기도 했다.


4년의 재임 기간 동안 외부적인 활동을 많이 한 이창희 회장은 이승수 회장에 이어 직능단체 협의회장과 범죄방지 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기도 했다.


2006년도6월1일 브로드 스트리트의 K&S wireless 에서 총격사건이 발생해김성겸씨와김성준 씨가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후김성준 씨 유가족 돕기 운동을 두 달 동안 전개해 4만6천여 달러의 성금을 모아 미망인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창희 회장은 “식품인 협회가 발전을 거듭하며 소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임원 이사들의 헌신과 그 가족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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